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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信仰이야기

'십자가의 전달자'

<양해의 말씀>

 

다음의 블로그 서비스가 tistory로 옮겨가는 것을 계기로 글 쓰기를 그만 둘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양해의 글을 올리고 8월 말 이후에는 새 글을 올리지 않았습니다마는 계속 '뜬구름'을 찾아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오히려 전보다 더 많아 하루에 80분을 넘기는 날이 이달 들어 어제까지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 들고 계속 헛걸음을 하게 하시는 것이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쭙잖은 글이지만 다시 쓸까 합니다.

오늘은 십자가 전달자라는 제목으로 저의 개인적인 신앙 간증을 올려볼까 합니다.

글 내용에 잘못이 있다면 용서해주시고 댓글로 지적해주시면 바로 잡겠습니다. 감사합니다. 詩農 올림

 

 

 

십자가의 전달자

 

나는 CCM ‘십자가의 전달자를 들을 때마다 아펜젤러선교사님을 떠올리며 눈물이 흐르는 것을 애써 참는다.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2.6 ~ 1902.6.11) 선교사님은 감리교 목사로 아내 D.엘라와 함께 고종 때인 188545일 인천 제물포를 통해 조선으로 입국하였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사립학교인 배재학당과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회인 정동교회를 창설하였다.

배재학당은 이승만 대통령, 시인 소월 김정식, 한글학자 주시경, 항일독립군 지청천 장군 등 수많은 선구자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다.

 

기록을 찾아보니 아펜젤러 선교사님은 H.G.언더우드, J.S.게일 등과 함께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을 시작하여 마태오의 복음’ ‘마르코의 복음서’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I ·II)를 번역하였다.

선교사님은 또 외우는 방식으로 진행되던 종래의 교육방식을 이해 중심적인 방식으로 바꾸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러나 너무나 애석하게도 1902년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 번역자 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길에 타고 있던 배가 다른 배와 충돌하는 바람에 44살의 젊은 나이로 순교하고 말았다. 동행한 정신여학교 여학생을 구하려다가 함께 실종된 것이다.

 

16살 때 아버지의 비보를 접해야 했더 딸 앨리스 레베카 아펜젤러도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스크랜턴(Marl Scranton 1885~1906) 부인이 한옥에 세운 이화학당 교사를 신축하고 이화 여자 전문학교 교장으로 봉사했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자 다시 돌아와 평생 독신으로 있으면서 학교 발전에 진력하였고 1950년 학교에서 설교를 하다가 쓰러져 순직했다.

12살 때 아버지를 잃은 그의 아들 헨리 닷지 아펜젤러도 미국에서 공부를 마친 뒤 배재학당 교장으로 있으면서 우리나라의 독립을 도왔다.

조난 사고 때 시신도 찾지 못한 아펜젤러 선교사님의 가묘(假墓)와 아들 부부, 그리고 딸의 묘가 지금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있다.

내가 십자가의 전달자를 들을 때마다 아펜젤러 선교사님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는 것은 그분들의 모든 것을 던진 우리들에 대한 사랑의 헌신과 하나님이 묶어주신 그분과 나의 특별한 인연에 대한 감사 때문이다.

 

미국에서 목사로 있는 내 사위의 아버님도 목사다. 박종선 목사님이시다.

내 사위가 고등학교 2년 재학 때 미국감리교의 초빙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목회 일을 하시다가 은퇴하셨다. 올해 88세가 되신 목사님은 최근 한국에 나와 디딤돌 열두 개와 하나님의 우체부라는 자서전을 펴내셨다.

이 책 119페이지를 보면 인우학사 난방시설 교체라는 소제목의 글이 있다.

인우학사625전쟁이 끝난 뒤인 1954, 어려운 시골 학생들을 위하여 미국 인디애나 주 연합감리교회가 후원하여 지은 기숙사의 이름이다.

이 글은 건물이 오래되어 곳곳이 새고 난방시설도 고장 나 있는 것을 사감으로 시무하시던 최요한 목사님이 영어에 능통하신 박 목사님에게 부탁, 인디애나 연합회의 도움을 다시 얻어내 보수한 이야기를 짧게 소개하고 있다. 당시 박종선목사님은 전도사로 일하고 계셨다.

이 건물은 그 후 계속 기숙사로 사용되어 1만여 명의 학생들이 거쳐 갔는데 재작년 코로나로 문을 닫았다.

그러나 노후화되어 더 이상 기숙사로 사용하기가 어렵게 되고 학생들의 인기도 낮아짐에 띠라 감리교회인 광림교회가 거액을 후원, 개축하여 작년 겨울 아펜젤러 선교센터로 개명하고 해외에서 선교하다가 잠시 귀국한 선교사들이 묵어갈 수 있는 곳으로 바뀌었다.

다음 주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실 예정인 목사님은 지금 사모님과 함께 아펜셀러 선교센터에 머물고 계신다.

 

이것은 작은 에피소드다. 내가 말하려는 아펜젤러 선교사님과 나의 인연은 이제부터다.

내 딸은 나보다 훨씬 먼저 예수님을 알았다.

내가 교회에 나가게 된 것은 순전히 딸 때문이었다, 광림교회에 나가던 딸이 서울대 음대에 원서를 낸 뒤 내가 교회에 한 번만 나와주면 합격이 될 것 같다고 말하는 바람에 불합격의 원망을 듣기 싫어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딸은 서울대학교 음대에 재학하던 시절 광림교회의 성가대원과 주일학교 선생으로 봉사하다가 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 보스턴으로 유학을 갔다.

그때 주일학교 부장님의 동생이 보스턴 한인교회 사모셨고 부장님의 연락을 받은 사모께서 보스톤 초행길인 내 딸을 공항으로 마중 나왔다. 그 인연으로 내 딸은 그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거기서 목사 지망생으로 성가대를 이끌던 사위를 만났던 것이다.

딸은 미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뒤 대학과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정동교회에서 영어 예배의 피아노 반주로 봉사했다.

그리고 정동교회에서 결혼, 우리들 곁을 떠나 미국으로 가 사모가 됐다. 내 아들은 광림교회에서 결혼했다.

 

딸의 시어머님은 이화여중고와 이화여대 기독교학과를 나온 철저한 이화학당 출신이다.

그리고 내 며느리와 며느리의 친정어머님도 이화여중고와 이화여대 출신인데 공교롭게 어머니끼리는 중학교에서부터 대학까지 동기 동창이다.

 

그뿐 아니다.

내 친손자가 지금 배재대학에서 e-커머스를 전공하고 있다.

고등학교 때 기흉(氣胸)을 앓아 성적이 좋지 못했던 탓으로 등급을 낮추어 이곳저곳 원서를 냈던 것인데 공교롭게도 손자가 사는 대전에 있는 배재학당에 합격이 된 것이다. 게다가 장학생으로 입학, 3학년부터는 전액 장학생이 되었고 학교에서 아르바이트 자리도 알선해주어 잘 다니고 있다.

물론 손자가 입학원서를 쓸 때 나나 우리 가족들은 누구도 아펜젤러 선교사님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내가 최근 박종선 목사님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이 모든 일이 우연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아펜젤러 센터와 정동교회, 이화학당과 배재대학에 얽힌 이 모든 일들이 지금으로부터 137년 전 우리나라에 십자가를 전달하러 오신 아펜젤러 선교사님이 뿌리신 은혜의 씨앗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후 나는 유튜브에서 많은 가수들이 저마다 다른 악기들과 다른 방식으로 십자가의 전달자를 노래하는 것을 모두 즐겨 듣는다.

예수님을 모르고 어둠 속에서 살던 이 나라에 십자가를 전해주러 오셨다가 동행하던 어린 여학생 신도와 함께 이국땅 찬 바다 밑에서 잠들어 계신 아펜젤러 목사님과 그 가족들을 생각하며 듣는 십자가의 전달자는 내게 전율과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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